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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와 정신/홍익 문명사

약탈의 중화, 공유의 홍익

by hongiks 2026. 2. 2.

1. 영토의 약탈: 물리적 강점과 팽창의 논리

과거부터 현재까지 중국이 주변국을 대하는 가장 원초적인 방식은 영토의 확장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힘이 닿는 곳마다 깃발을 꽂으며 이를 ‘변방의 평정’이나 ‘수복’이라 미화해왔습니다. 군사력을 앞세워 남의 땅을 점령하고 지배력을 행사하는 행위는 인류 역사상 가장 노골적인 약탈입니다.

 

현대 국제 사회에서도 이러한 팽창주의는 멈추지 않고 있습니다. 남중국해의 영유권 분쟁이나 국경 인근 국가들에 대한 압박은, 힘의 우위가 곧 정의라는 구시대적 패권주의의 산물입니다. 영토의 약탈은 단순히 땅을 뺏는 것을 넘어, 그 땅에 터 잡고 살아가던 이들의 주권을 짓밟는 행위입니다. 하지만 땅은 뺏을 수 있어도 그 땅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까지 굴복시킬 수는 없음을 역사는 증명해왔습니다.

출처: 일요저널

2. 역사의 강탈: 현재를 위해 과거를 훔치다

물리적 영토 확장으로 발생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중국은 정신적 침략을 시작합니다. 이것이 바로 ‘역사 공정’입니다. 중국은 현재의 국경선 안에 존재했던 모든 역사를 자국사의 방계로 편입하려는 기괴한 논리를 펼칩니다. 몽골의 영웅 징기스칸을 중국인이라고 주장하고 몽골의 역사를 중국의 역사라고 주장합니다. 유럽까지 아우르는 세계 제국을 이루었던 몽골의 과거 영토를 중국의 영토라고 우기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고구려와 발해 같은 이웃 민족의 찬란한 유산을 ‘중화 문명의 일부’로 둔갑시키는 동북공정은, 영토 점령을 정당화하기 위한 역사의 강탈입니다.

 

남의 나라 조상을 강제로 자기 집 족보에 입적시키는 이 파렴치한 행태는, 과거 그 땅에서 독자적인 문명을 일궈온 민족들의 정체성을 말살하려는 시도입니다. 역사는 과거의 기록이 아니라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정신적 뿌리입니다. 그 뿌리를 가로채려는 것은 타인의 영혼을 소유하려는 오만함의 발현에 다름 아닙니다.

3. 기술의 약탈: 타인의 땀방울을 가로채는 조급함

이러한 약탈적 사고는 현대 산업 사회에 이르러 ‘기술 도용’이라는 형태로 가장 비열하게 나타납니다. 수십 년간 많은 인력과 자금을 투자해 일궈낸 타국의 첨단 기술을 해킹이나 인력 유출로 한순간에 가로채는 행태에는, 연구자들이 쏟은 시간과 열정에 대한 존중이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기술을 개발하는 것은 천고의 고독과 실패를 견디는 과정입니다. 하지만 중국은 그 과정을 생략한 채 결과만을 취하려 합니다. 영토를 뺏듯 기술을 뺏고, 역사를 뺏듯 지적 재산권을 뺏는 그들에게 ‘공정한 경쟁’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과거 자신들이 종이나 화약을 발명했으니 현대의 모든 기술도 자신들의 지분이라고 여기는 굴절된 보상 심리는, 스스로 새로운 가치를 창조해낼 에너지가 고갈되었음을 보여주는 서글픈 지표이기도 합니다.

4. 문화의 약탈: 일상이 결여된 주장의 공허함

약탈 연대기의 마지막은 삶의 양식인 ‘문화’의 약탈입니다. 한복과 김치를 자신의 것이라 우기며 원조의 깃발을 꽂으려는 행태를 보며 저는 참으로 기이한 공허함을 느꼈습니다. 누군가의 문화를 자신의 것이라고 우기려면, 적어도 그 문화를 매일의 일상으로 품고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 때문입니다. 진정으로 그것이 자신들의 뿌리라면, 굳이 고대 문헌을 뒤지거나 관 주도의 공정을 벌이기 전에 먼저 매일 한복을 입고 김치를 담가 먹는 생활의 풍경부터 보여주어야 마땅합니다. 문화의 주인은 "이것은 내 것이다"라고 외치는 자가 아니라, 그것을 아끼고 향유하며 삶의 일부로 살아내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일상에서 입지도, 먹지도 않으면서 오직 ‘원조’라는 이름의 소유권만을 주장하는 것은 문화를 대하는 최소한의 예의조차 없는 탐욕입니다. 자신들의 삶에는 없는 것을 단지 역사적 연고를 핑계로 빼앗으려 한다면, 그것은 문화의 계승이 아니라 명백한 ‘강탈’입니다.

5. 홍익의 재창조와 한류: 자연스러운 공유의 힘

중국이 폐쇄적인 종주권과 약탈의 논리에 갇혀 이웃의 문화를 자신의 테두리 안으로 강제 편입시키려 할 때, 우리의 문화는 홍익인간(弘益人間)이라는 거대한 뿌리 위에서 ‘개방’과 ‘공유’의 꽃을 피워왔습니다. 우리는 외래의 것을 받아들여 우리만의 색깔로 승화시키는 데 결코 주저함이 없었습니다. 그 당당한 자존감의 증거가 바로 우리가 사랑하는 짜장면 한 그릇에 담겨 있습니다.

 

우리는 짜장면의 유래가 중국임을 숨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뿌리를 정직하게 인정하면서도, 그 위에 한국인의 감성을 담아 세상 어디에도 없는 독창적인 음식으로 완성해냈습니다. 수십 년의 세월 동안 매일같이 일상생활에서 한국인들이 즐기고 나누는 음식으로 발전시켜온 이 생생한 실천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우리의 삶 자체가 되었습니다. 이제 세계인은 그 유래를 따지기에 앞서, 한국인들이 이토록 애정을 쏟아 가꾸어온 짜장면을 보고 자연스럽게 ‘한국의 음식’이라 인정해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정체성이 그만큼 뿌리 깊고 단단하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결국 진정한 문화의 힘은 남의 것을 탐내어 뺏어오는 약탈이 아니라, 세상의 좋은 것을 받아들여 더 나은 가치를 더하고, 그것을 다시 세상 사람들과 널리 나누어 이롭게 하는 데서 나옵니다. 중국이 모든 문화의 원조임을 강요하며 주변을 지배하려 들 때, 우리는 타인의 성취를 기꺼이 인정하고 그 위에 우리의 신명과 정성을 보태어 전 세계가 함께 즐길 수 있는 새로운 문화를 선물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한류(韓流) 역시 이러한 홍익의 맥락 위에 서 있습니다. 그것은 누군가에 의해 강요된 문화가 아니라, 우리가 즐기는 노래와 음식이 국경을 넘어 세계인의 심장을 두드린 자연스러운 공유의 결과입니다. 타자를 지배하려 들지 않고, 슬픔과 기쁨을 공감하며 세상을 널리 이롭게 하려는 홍익의 부드러운 힘. 억지로 우겨서 뺏은 김치와 한복에는 결코 담길 수 없는 그 살아있는 생명력이야말로 우리 문화가 가진 진정한 정수입니다. 우리는 소유하려 들지 않기에 비로소 전 세계와 공유할 수 있으며, 인정할 줄 알기에 더욱 빛나는 창조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6. 친구가 없는 거인: 신뢰가 없는 관계의 종말

영토를 침략하여 약탈하고, 역사를 왜곡하여 강탈하며, 이제는 남의 기술과 문화마저 제 것이라 우기는 중국의 행태는 국제 사회에서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자멸적인 선택입니다. 영토, 역사, 기술, 문화, 이러한 약탈의 논리는 단 하나, 타인의 주권과 노력을 인정하지 않는 철저한 자기중심적 패권주의입니다.

 

세상 어느 누구도 남의 것을 탐내고 우기는 나라와 진정한 우정을 맺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친구는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성취를 축하해주는 신뢰 위에서만 탄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돈과 힘으로 사람을 일시적으로 굴복시킬 수는 있어도, 마음을 얻어 진정한 우방을 만드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중국은 수많은 인구와 거대한 땅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주변국을 존중하지 않는 오만함 때문에 국제 사회에서 고독한 약탈자로 남게 될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

 

진정한 대국(大國)은 영토의 크기나 경제의 지표가 아니라, 남의 것을 존중할 줄 아는 마음의 크기에서 결정됩니다. 중국이 지금처럼 이웃 나라의 문화를 탐내고 기술을 훔치며 역사를 부정한다면, 그들은 영원히 ‘원조’라는 이름의 낡은 창고지기로 남을 뿐입니다. 창고 안에 가득 쌓인 유물들이 아무리 빛나도, 그것을 일상에서 입고 먹으며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내지 못한다면 그것은 죽은 문화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짜장면의 유래를 밝히고 타국의 기술적 성취를 존중하는 것은, 그러한 인정이 우리의 자존감을 전혀 훼손하지 않는다는 당당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훔친 기술과 빼앗은 문화로는 결코 사람의 마음을 얻는 진정한 이로움을 만들어낼 수 없습니다. 약탈의 중화를 넘어 상생의 홍익으로 나아가는 길, 그 길만이 중국이 국제 사회의 진정한 일원으로 존경받을 수 있는 유일한 통로입니다.

 

남의 것을 탐내는 조급함 대신, 자신들의 것을 아름답게 가꾸어 남들이 스스로 따르게 하는 홍익의 지혜를 그들도 부디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지켜온 이 담백한 인정과 뜨거운 재창조의 힘이, 탐욕의 시대를 살아가는 인류에게 진정한 문화의 주인이 되는 법을 일러주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