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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비평

한·중·일 3국의 전쟁사에서 민(民)의 역할 비교

by hongiks 2026. 6. 6.

들어가며

전쟁은 국가가 치르지만, 실제로 싸우고 죽고 버티는 것은 국민이다. 그런데 한·중·일 세 나라의 전쟁사를 들여다보면, '국민'이 전쟁에서 수행한 역할의 성격이 놀랄 만큼 다르다. 중국의 민(民)은 왕조를 뒤엎는 혁명의 주체이자 전쟁의 연료였고, 한국의 민은 외침 앞에서 국가가 무너질 때 오히려 스스로 일어서는 의병(義兵)의 전통을 만들었으며, 일본의 민은 오랫동안 전쟁에서 철저히 배제된 채 무사 계층의 전쟁을 구경하다가 근대에 이르러 폭발적으로 동원되었다. 이 세 가지 경로는 각 사회의 권력 구조, 신분 체계, 그리고 국가와 개인의 관계를 고스란히 반영한다.


1. 중국 — 민란(民亂)이 곧 전쟁이었다

농민, 왕조를 만들고 부수는 자

중국 전쟁사에서 민(民)의 역할을 이해하는 핵심 개념은 농민반란이다. 중국에서 농민은 단순한 피해자나 소모품이 아니었다. 그들은 때로 왕조를 무너뜨리는 주체였고, 심지어 새 왕조를 세우기도 했다. 한(漢)을 건국한 유방은 농민 출신이었고, 명(明)을 세운 주원장은 걸식 승려 출신의 빈농이었다. 이것은 세계사에서도 드문 사례다.

이 현상의 배경에는 중국의 압도적인 인구 규모와, 토지 겸병으로 인한 주기적 빈곤화 메커니즘이 있었다. 왕조 후기마다 대토지를 가진 호족·귀족이 농민의 땅을 흡수하면, 유민(流民)이 대규모로 발생했다. 갈 곳 없는 수백만 유민이 조직화되면 그것이 곧 반란군이 되었다. 진승·오광의 난(기원전 209년), 황건적의 난(184년), 황소의 난(875년), 홍건적의 난(1351년), 이자성의 난(1644년)은 모두 이 패턴을 따른다.

전쟁에서의 이중적 존재

그러나 중국 민의 역할은 양면적이었다. 능동적 반란 주체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전쟁의 가장 큰 피해자이기도 했다. 왕조 교체기의 전쟁은 민간에 재앙적인 피해를 안겼다. 삼국시대 전란기에 중국 인구는 5000만에서 1000만으로 줄었다는 추산이 있다. 태평천국운동(1850~1864)으로 인한 사망자는 2000만에서 3000만 명으로 추정된다. 민이 전쟁을 일으키면, 그 전쟁은 다시 민을 먹어치웠다.

외침 앞에서의 민

외부 침략에 대한 민의 반응은 내부 반란과는 사뭇 달랐다. 이민족의 침략 앞에서 민은 종종 왕조보다 더 완강하게 저항했다. 남송 말기 몽골의 침략에 맞서 양양(襄陽)은 5년간 고립 농성을 벌였고, 그 주역에는 민간 의용군이 포함되어 있었다. 명·청 교체기에 강남의 일부 도시들은 청나라에 결사항전했으며, 항주·가흥 등지의 민간인 저항은 기록에 남아 있다. 그러나 이런 저항은 조직화된 민족 의식보다는 공동체 보호 본능에 가까운 것이었다. '중화(中華)'라는 문명적 자부심이 저항의 언어가 되기는 했지만, 그것이 근대적 민족주의로 발전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근대 이후 — 민의 각성

아편전쟁(1840)과 그 이후의 굴욕이 중국 민의 정치적 각성을 촉진했다. 의화단운동(1900)은 민간 종교 결사가 반외세 전쟁을 주도한 사례로, 국가가 아닌 민이 전쟁의 전면에 나선 것이었다. 20세기의 국공내전과 항일전쟁에서는 마오쩌둥의 인민전쟁론이 민을 전쟁의 핵심 전략 자원으로 이론화했다. "인민은 전쟁의 바다"라는 개념은 중국 전쟁사에서 민의 역할이 집약된 명제라 할 수 있다.


2. 한국 — 국가가 무너질 때 민이 일어섰다

의병(義兵) — 한국 전쟁사의 독특한 현상

한국 전쟁사에서 가장 독특하고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현상은 **의병(義兵)**이다. 의병이란 국가의 명령 없이, 때로는 국가가 붕괴한 상황에서 민간이 자발적으로 조직한 군사 집단이다. 이것이 단발성 사건이 아니라 고려 때부터 조선을 거쳐 일제강점기까지 반복되었다는 점에서, 한국 전쟁사의 구조적 특징으로 보아야 한다.

왜 한국에서 의병이 반복적으로 등장했을까. 역설적이게도 국가(조정)의 취약성 때문이었다. 외침이 발생했을 때 조정이 제 기능을 못하는 상황이 반복되었고, 그 공백을 민이 메웠다. 이것은 한국의 민이 국가에 대해 이중적 관계를 맺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평시에는 수탈의 대상이었지만, 위기 시에는 국가를 대신하는 주체가 되었다.

고려 — 거란·몽골 침략과 민의 저항

고려 현종 때 거란의 2차 침입(1010)에서 개경이 함락되고 왕이 피난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그러나 각지에서 지방 호족과 농민이 결합한 방어 조직이 자생적으로 형성되었다. 강감찬의 귀주대첩(1019)은 정규군의 승리였지만, 그 배후에는 각지의 자발적 저항이 거란군의 보급선을 흔든 공로가 있었다.

몽골의 침략(1231~1259)은 더욱 극적이다. 고려 조정은 강화도로 천도하여 40년간 버텼지만, 그 40년간 육지에서 싸운 것은 대부분 각지의 농민과 천민 부대였다. 처인성 전투(1232)에서 몽골의 살리타이 장군을 사살한 김윤후는 승려 출신이었고, 그를 도운 것은 처인 부곡의 향리와 농민들이었다. 국가가 섬으로 도망간 자리에서 민이 육지를 지켰다.

임진왜란 — 의병의 절정

임진왜란(1592~1598)은 한국 전쟁사에서 민의 역할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난 사건이다. 왜군이 상륙한 지 불과 20일 만에 한성이 함락되고 선조가 의주로 피난했을 때, 조선의 정규군은 사실상 붕괴 상태였다. 이 공백을 메운 것이 전국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이었다.

곽재우는 경상도에서 자신의 재산을 털어 의병을 조직했고, 조헌은 충청도에서, 고경명은 전라도에서 의병을 이끌었다. 특히 주목할 것은 의병의 사회적 구성이다. 지도자는 대체로 재야 유생이나 전직 관료였지만, 실제 전투원은 농민·천민·승려로 구성된 다층적 집단이었다. 승려 의병을 이끈 서산대사·사명당의 사례는 신분을 초월한 민의 결집을 보여준다.

의병의 전술적 기여도 중요했다. 정규전보다 게릴라전을 통해 왜군의 보급선을 교란하고 후방을 불안정하게 만드는 데 의병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이순신의 수군이 바다를 틀어막고 의병이 육지의 후방을 흔든 것이 7년 전쟁의 핵심 구도였다.

병자호란의 대비 — 의병이 없었던 전쟁

임진왜란과 대비하여 병자호란(1636)을 보면 흥미로운 역설이 있다. 병자호란에서는 의병이 거의 등장하지 않았다. 왜인가. 임진왜란 이후 조선 조정이 역설적으로 의병 세력을 경계하고 해산시키는 정책을 폈고, 전쟁 직전까지 지배층이 주화파와 척화파로 분열하여 민심을 모으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의병은 자연발생적이기도 하지만, 지배층의 도덕적 권위와 민의 신뢰가 갖추어져야 작동하는 시스템이었다.

구한말·항일기 — 의병의 마지막 불꽃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을 계기로 을미의병이 일어났고, 을사늑약(1905) 이후 을사의병, 군대 해산(1907) 이후 정미의병으로 이어지는 항일 의병 운동은 국가가 소멸하는 상황에서도 민이 스스로 전쟁의 주체가 되려 한 마지막 시도였다. 이 의병 전통은 이후 독립군과 광복군으로 이어졌다.


3. 일본 — 전쟁은 무사의 것, 민은 구경꾼이었다

병농분리(兵農分離) — 구조적 배제

일본 전쟁사에서 민의 역할을 이해하는 핵심 개념은 **병농분리(兵農分離)**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1588년 칼 사냥령(刀狩令)을 내려 농민에게서 무기를 빼앗고, 무사·농민·상인의 신분을 법으로 고정시킨 이후, 일본에서 전쟁은 철저히 무사 계층의 전유물이 되었다. 농민은 세금을 내고 식량을 공급하는 존재였지, 싸우는 존재가 아니었다.

이것은 에도 시대(1603~1868) 260년간 제도적으로 완성되었다. 전국에서 무기가 회수되고, 농민이 칼을 차는 것 자체가 불법이 되었다. 그 결과 일본의 민간인은 전쟁의 기술적·심리적 능력을 잃어버렸다. 전쟁을 모르는 국민이 만들어진 것이다.

전국시대(戰國時代)의 아시가루

그러나 병농분리 이전, 전국시대(1467~1615)에는 달랐다. 이 시기 **아시가루(足輕)**로 불리는 하급 보병은 농민 출신이 대부분이었다. 이들은 전쟁에 참여했지만, 그것은 자발적 의지보다 영주에 대한 예속 관계에서 비롯된 동원이었다. 오다 노부나가는 나가시노 전투(1575)에서 아시가루 조총대를 조직적으로 운용하여 전술 혁명을 이루었는데, 이는 민간인의 전쟁 참여라기보다 병력 자원으로서의 동원에 가까웠다.

막부 말기와 민의 등장

에도 막부 말기, 외부의 충격(페리 제독의 흑선 내항, 1853)이 가해지자 민의 정치적 각성이 시작되었다. 도사(土佐) 번 같은 하급 무사와 상인 계층이 정치에 참여하기 시작했고, 일부 농민 출신이 존왕양이(尊王攘夷) 운동에 합류했다. 그러나 메이지 유신 자체는 하급 무사 주도의 정치 혁명이었고, 민의 역할은 주변적이었다.

메이지 이후 — 국민의 발명과 총동원

메이지 정부는 근대 국가 건설을 위해 '국민'을 새로 발명해야 했다. 1873년 징병령 선포는 혁명적 사건이었다. 신분에 관계없이 모든 남성이 군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병농분리의 전통과 정면으로 충돌했다. 실제로 초기에는 농민의 저항이 있었다. 그러나 메이지 정부는 국민교육·신사참배·천황 숭배 이데올로기를 통해 수십 년에 걸쳐 '황국신민(皇國臣民)'이라는 정체성을 주입했다.

그 결과는 청일전쟁(1894)·러일전쟁(1904)·제1차 세계대전을 거쳐 태평양전쟁(1941~1945)에서 폭발했다. 국민은 자발적 의지가 아닌 국가에 의해 설계된 집단적 정체성 속에서 전쟁에 동원되었다. 가미카제(神風) 특공대, 본토결전을 위한 죽창 훈련, 오키나와 주민 집단자결 강요에 이르기까지, 일본의 민은 스스로를 국가와 동일시하도록 훈육된 끝에 전쟁의 소모품이 되었다. 이것은 자발적 저항의 전통을 가진 중국·한국의 민과 근본적으로 다른 경로였다.


4. 세 나라 비교 — 민의 역할은 왜 달랐는가

구분중국한국일본
평시 민의 위치 수탈 대상, 잠재적 반란 주체 수탈 대상, 도덕 공동체 구성원 제도적으로 전쟁에서 배제
외침 시 반응 공동체 방어 + 왕조와 갈등 자발적 의병 조직 무사 계층에 의존, 민은 후방
내란 시 역할 반란의 주체, 왕조 교체 동력 지배층 내 갈등에 동원 영주 간 전쟁에 아시가루로 동원
저항의 언어 천명 상실, 생존권 충의(忠義), 향토 보호 근대 이전엔 거의 없음
근대적 동원 인민전쟁론(자발성 강조) 독립군·광복군(저항적 자발성) 황국신민(위로부터의 강제)
전쟁 후 민의 변화 혁명적 주체 의식 저항적 시민 의식 패전 후 탈군사화

차이를 만든 세 가지 구조

첫째, 신분 제도의 성격. 일본의 병농분리는 민을 전쟁에서 구조적으로 배제했다. 반면 한국과 중국은 신분제가 있었지만 위기 시 민이 무장하는 것을 완전히 막지 못했다. 특히 한국은 유교적 의리 관념이 신분을 넘어 민을 전쟁 참여로 이끄는 윤리적 언어를 제공했다.

둘째, 국가와 민의 신뢰 관계. 한국 의병의 반복적 등장은 역설적으로 조선 국가의 도덕적 권위가—비록 실제 능력은 부족했지만—민에게 일정한 신뢰를 받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민이 국가를 대신해 싸우는 것은, 그 국가의 가치를 민이 내면화하고 있다는 뜻이다. 중국에서는 이 신뢰가 왕조 말기에 붕괴했기 때문에 민란이 발생했다.

셋째, 지리와 침략의 빈도. 한국은 반도라는 지리적 특성상 외침을 정면으로 받아야 했고, 조정이 피난하면 민이 남겨지는 구도가 반복되었다. 중국은 워낙 광대하여 변경과 중원의 차이가 컸고, 일본은 바다 덕분에 대규모 외침을 거의 경험하지 않아 민의 저항 경험 자체가 쌓이지 않았다.


나오며 — 전쟁이 만든 민, 민이 만든 역사

전쟁사에서 민의 역할은 단순히 "얼마나 많이 싸웠는가"의 문제가 아니다. 전쟁이 민에게 어떤 경험을 남겼는가가 더 중요하다.

중국의 민은 왕조를 무너뜨릴 수 있다는 경험을 반복하면서, 혁명적 주체 의식을 역사 속에 축적했다. 그것이 20세기 공산혁명의 토양이 되었다. 한국의 민은 국가가 무너질 때 스스로 일어서는 경험을 반복하면서, 저항적 시민 의식의 원형을 만들었다. 임진왜란의 의병, 독립운동, 그리고 현대의 민주화 운동은 같은 유전자를 공유한다. 일본의 민은 오랫동안 전쟁에서 배제되다가 근대에 갑작스럽게 국가에 의해 동원되었고, 그 경험은 패전 후 극단적인 탈군사화·평화주의로 귀결되었다.

역사 속 민의 역할은 과거에만 머물지 않는다. 세 나라가 오늘날 전쟁과 국가, 그리고 개인의 책임을 대하는 방식에는 이 긴 역사의 무게가 깊이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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